고려사 절요

휘(諱) 감찬(邯贊)

강감찬(姜邯贊)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AC15AC10CC2CB0947X0 
시호 인헌(仁憲) 
생졸년 948 (정종 3) - 1031 (현종 22)  
시대 고려 전기 
본관 금주(衿州)  
활동분야 문신/관료 / 문신-고려 / 명신 
과거 및 취재 [고려문과] 성종(成宗) 2년 (983) 계미(癸未) 성종 2년 계미방(成宗 二年 癸未榜 

[상세내용]
강감찬(姜邯贊)에 대하여
948년(정종 3)∼1031년(현종 22). 고려의 명신. 본관은 금주(衿州: 지금의 始興). 초명은 은천(殷川).경주로부터 금주에 이주해 호족으로 성장한 여청(餘淸)의 5대 손이며, 왕건을 도운 공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된 궁진(弓珍)의 아들이다. 983년(성종 3) 과거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한 뒤 예부시랑이 되었다.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聖宗)이 강조(康兆)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서경(西京)을 침공하자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나주로 피난하여 사직을 보호하였다.이듬해에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승지·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지내고, 1018년에는 경관직인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와 외관직인 서경유수(西京留守)를 겸하였다. 서경유수는 단순한 지방의 행정관직이 아니라 군사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으로 보인다.그러자 그해에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였다. 이에 그는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총사령관격인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도처에서 거란군을 격파하였다.특히, 귀주에서의 대첩은 대 외 항전 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고려의 20만 대군은 안주에서 대기하다가 적의 접근을 기다려 흥화진(興化鎭: 지금의 義州 威遠面)으로 나가 정예 기병 1만 2,000명을 산기슭에 잠복 배치한 뒤 큰 새끼 줄로 쇠 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아두었다가 때를 맞추어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큰 전과를 거두었다.그 전투에서 패전한 거란군은 곧바로 개경(開京)을 침공하려 했으나, 자주(慈州)와 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였으며, 귀주에서는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어 침입 군 10만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 천에 불과하였다고 한다.그 전공으로 현종은 친히 영파역(迎波驛: 지금의 義興)까지 마중을 나와 극진한 환영을 하였다. 강감찬으로 인해 거란은 침략 야욕을 버리게 되고 고려와는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다.전란이 수습된 뒤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 門下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 天水縣開國男 食邑三百戶)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特進檢校太傅 天水縣開國子 食邑五百戶)에 봉해진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그러나 103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이 즉위 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개국후 식읍일천호(開府儀同三司 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 特進 檢校太師 侍中 天水縣開國侯 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 그는 비단 거란과의 항전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개경에 나성(羅城)을 쌓을 것을 주장하여 국방에 대해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현재 그의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현종묘정에 배향되고 문종 때에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그의 저서로는 《낙도교거집 樂道郊居集》과 《구선집 求善集》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참고문헌]
高麗史高麗史節要姜邯贊(姜晋哲, 韓國의 人間像 2, 新丘文化社, 1980) 
[이미지]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 인물종합 시스템-인물사전

작가 조석린 
블로그에서 퍼온글

인헌공 강감찬 설화

고려사절요중 
인헌 감찬공 행적

112 병진 7년(1016)
고려사절요/제3권/현종원문대왕/병진 7년(1016)

十二月(십이월) : 12월에 
吏部尙書姜邯贊奏 : 이부상서 강감찬(姜邯贊)이 아뢰기를, 
臣於開寧縣 : “신이 개녕현(경북 尙州)에 
有良田十二結 : 좋은 전지 12결이 있으니 
請給軍戶 : 군호(軍戶)에게 주소서." 하니, 
從之 : 그 말을 따랐다. 

以姜邯贊 : 강감찬을 
爲西京留守 : 서경유수 
內史侍郞 平章事 : 내사시랑 평장사로 삼고 
王手書告身後曰 : 왕이 손수 고신(告身; 벼슬 임명장)의 뒤에 쓰기를, 
庚戌年中有虜塵 : “경술 연간에 오랑캐의 난리가 있어 
干戈深入漢江濱 : 군사가 깊이 한강 가에까지 들어왔도다. 
當時不用姜公策 : 그 당시에 강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擧國皆爲左衽人 : 온 나라가 모두 오랑캐의 옷을 입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하였다. 
世多榮之 : 세상에서 대부분 그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 
戊戌 : 무술일에 
契丹駙馬蕭遜寧 : 거란의 부마 소손녕(蕭遜寧)이 
帥兵來侵 :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략하면서 
號十萬 : 군사 10만 명이라고 소리쳤다. 
王以平章事姜邯贊 : 왕은 평장사 강감찬을 
爲上元帥 : 상원수(上元帥)로, 
大將軍姜民瞻副之 :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帥兵二十萬八千三百 : 군사 20만 8천 3백 명을 거느리고 
屯寧州 : 영주(寧州 평남 安州)에 주둔하게 하였다. 
至興化鎭 : 흥화진에 이르러 
選騎兵一萬二千 : 기병 1만 2천 명을 뽑아 
伏山谷中 : 산골 속에 매복시키고 
又以大繩貫牛皮 : 또 큰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塞城東大川 :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아두고 
以待之 : 적을 기다렸다가, 
賊至 : 적이 이르자 
決塞發伏 : 막은 물을 터놓고 복병을 내어서 
大敗之 : 적을 크게 패퇴시켰다. 
遜寧引兵 : 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直趍京城 : 바로 서울로 들어오자 
民瞻 : 민첨이 
追及於慈州來口山 : 자주(慈州) 내구산(평남 順川)까지 뒤쫓아 와서 
大敗之 : 적을 크게 패퇴시키고, 
侍郞趙元 : 시랑 조원(趙元)이 
又擊於馬灘 : 또 마탄(馬灘)에서 
斬獲萬餘級 : 적을 쳐 머리 1만여 급을 베었다. 

115 기미 10년(1019)
고려사절요/제3권/현종원문대왕/기미 10년(1019) 

春正月庚申 : 봄 정월 경신일에 
姜邯贊以丹兵逼京 : 강감찬이, 거란 군사가 서울에 가까이 오므로 
遣兵馬判官金宗鉉 :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을 보내어 
領兵一萬 :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倍道入衛京城 : 걸음을 배로 늘려 서울에 들어와 방위하고, 
東北面兵馬使 : 동북면 병마사 
亦遣兵三千三百 : 역시 군사 3천 3백 명을 
入援 : 보내 들어와 구원하였다. 
○ 
辛酉 : 신유일에 
蕭遜寧至新恩縣 : 소손녕이 신은현(황해도 新溪)에 이르니 
去京城百里 : 서울과의 거리가 백 리였다. 
王命收城外民戶入內 : 왕은 성밖의 민호를 전부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淸野以待 : 들판의 작물과 가옥을 철거하여 적군을 기다리도록 명하였다. 
遜寧 :  손녕이  
遣耶律好德 : 야율호덕(耶律好德)을 보내어 
賫書 : 서신을 가지고 
至通德門 : 통덕문(通德門)에 이르러 
告以回軍 : 군사를 돌이킨다고 알리고는, 
潛遣候騎三百餘 : 몰래 척후 기병 3백여 명을 보내어 
至金郊驛 : 금교역(황해도 金川)에 이르니 
我遣兵一百 : 우리 편에서 군사 1백 명을 보내어 
乘夜掩殺之 : 밤을 타서 습격하여 죽였다. 
○ 
辛巳 : 신사일에 
契丹回兵 : 거란이 군사를 돌려 
至漣渭州(至漣渭州) : 연위주에 이르니 
邯贊等 : 감찬 등이 
掩擊 : 습격하여 
斬五百餘級 : 머리 5백여 급을 베었다. 
○ 
二月己丑朔 : 2월 초하루 기축일에 
丹兵過龜州 : 거란 군사가 귀주를 지나니 
邯贊等) : 감찬 등이 
邀戰於東郊 : 동쪽들에서 맞아 크게 싸웠는데 
兩軍相持 : 양편의 군사가 서로 버티어 


077 계미 2년(983)
고려사절요제2권/성종문의대왕/계미 2년(983) 

賜姜殷川等三人 : 강은천(姜殷川)등 3명과 
明經一人及第 : 명경(明經) 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覆試自此始 : 복시(覆試)를 보는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殷川卽邯贊也 : 은천(殷川)은 곧 감찬(邯贊)이다.

106 경술 원년(1010)
고려사절요/제3권/현종원문대왕/경술원년(1010)  

辛未 : 신미일에 
智蔡文奔還于京 : 지채문(智蔡文)이 도망해 서울로 돌아와서, 
壬申 : 임신일에 
奏西京敗軍狀 : 서경에서 패전한 사실을 아뢰니 
群臣 : 여러 신하들이 
議降 : 항복하기를 의논하는데 
姜邯贊 : 강감찬만은 
獨曰 : 홀로 아뢰기를, 
今日之事 : “오늘날의 일은 
罪在康兆 : 죄가 강조(康兆)에게 있으니 
非所恤也 :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但衆寡不敵 : 다만 적은 수의 군사로 많은 군사를 대적할 수 없으니 
當避其鎽 : 마땅히 그 예봉을 피하여 
(徐圖興復耳 : 천천히 흥복(興復)을 도모해야 합니다." 하고는 
遂勸王南行 : 마침내 왕에게 남쪽으로 가기를 권하였다. 
蔡文請曰 : 채문이 청하기를, 
臣雖駑怯 : “신이 비록 노둔하고 겁쟁이이지마는, 
願在左右 : 원컨대 좌우에서 
庶效犬馬之勞 : 견마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하였다. 

108 임자 3년(1012)
고려사절요/제3권/현종원문대왕/임자 3년(1012) 

監察御使李仁澤免 : 감찰어사(監察御史) 이인택(李仁澤)이 면직되었다. 
仁澤與東北面行營兵馬使姜邯贊:인택이 동북면행영병마사(東北面行營兵馬使)강감찬(姜邯贊)과 
有隙 : 서로 틈이 생겨 
論訴不已 : 논소(論訴)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므로 
故免 : 면직되었다. 
○ 
秋七月(추칠월) : 가을 7월에 
中樞使姜邯贊 : 중추사(中樞使) 강감찬(姜邯贊)이 
請修社稷壇 : 사직단(社稷壇)을 수축하고 
令禮司議定儀注 : 예사(禮司)가 의주(儀注; 예식 행사의 순서)를 議定하게 하도록 청하니 
從之 : 그 말을 따랐다. 


112 병진 7년(1016)
고려사절요/제3권/현종원문대왕/병진 7년(1016)

十二月(십이월) : 12월에 
吏部尙書姜邯贊奏 : 이부상서 강감찬(姜邯贊)이 아뢰기를, 
臣於開寧縣 : “신이 개녕현(경북 尙州)에 
有良田十二結 : 좋은 전지 12결이 있으니 
請給軍戶 : 군호(軍戶)에게 주소서." 하니, 
從之 : 그 말을 따랐다. 

以姜邯贊 : 강감찬을 
爲西京留守 : 서경유수 
內史侍郞 平章事 : 내사시랑 평장사로 삼고 
王手書告身後曰 : 왕이 손수 고신(告身; 벼슬 임명장)의 뒤에 쓰기를, 
庚戌年中有虜塵 : “경술 연간에 오랑캐의 난리가 있어 
干戈深入漢江濱 : 군사가 깊이 한강 가에까지 들어왔도다. 
當時不用姜公策 : 그 당시에 강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擧國皆爲左衽人 : 온 나라가 모두 오랑캐의 옷을 입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하였다. 
世多榮之 : 세상에서 대부분 그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 
戊戌 : 무술일에 
契丹駙馬蕭遜寧 : 거란의 부마 소손녕(蕭遜寧)이 
帥兵來侵 :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략하면서 
號十萬 : 군사 10만 명이라고 소리쳤다. 
王以平章事姜邯贊 : 왕은 평장사 강감찬을 
爲上元帥 : 상원수(上元帥)로, 
大將軍姜民瞻副之 :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帥兵二十萬八千三百 : 군사 20만 8천 3백 명을 거느리고 
屯寧州 : 영주(寧州 평남 安州)에 주둔하게 하였다. 
至興化鎭 : 흥화진에 이르러 
選騎兵一萬二千 : 기병 1만 2천 명을 뽑아 
伏山谷中 : 산골 속에 매복시키고 
又以大繩貫牛皮 : 또 큰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塞城東大川 :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아두고 
以待之 : 적을 기다렸다가, 
賊至 : 적이 이르자 
決塞發伏 : 막은 물을 터놓고 복병을 내어서 
大敗之 : 적을 크게 패퇴시켰다. 
遜寧引兵 : 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直趍京城 : 바로 서울로 들어오자 
民瞻 : 민첨이 
追及於慈州來口山 : 자주(慈州) 내구산(평남 順川)까지 뒤쫓아 와서 
大敗之 : 적을 크게 패퇴시키고, 
侍郞趙元 : 시랑 조원(趙元)이 
又擊於馬灘 : 또 마탄(馬灘)에서 
斬獲萬餘級 : 적을 쳐 머리 1만여 급을 베었다. 


115 기미 10년(1019)
고려사절요/제3권/현종원문대왕/기미 10년(1019) 

春正月庚申 : 봄 정월 경신일에 
姜邯贊以丹兵逼京 : 강감찬이, 거란 군사가 서울에 가까이 오므로 
遣兵馬判官金宗鉉 :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을 보내어 
領兵一萬 :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倍道入衛京城 : 걸음을 배로 늘려 서울에 들어와 방위하고, 
東北面兵馬使 : 동북면 병마사 
亦遣兵三千三百 : 역시 군사 3천 3백 명을 
入援 : 보내 들어와 구원하였다. 
○ 
辛酉 : 신유일에 
蕭遜寧至新恩縣 : 소손녕이 신은현(황해도 新溪)에 이르니 
去京城百里 : 서울과의 거리가 백 리였다. 
王命收城外民戶入內 : 왕은 성밖의 민호를 전부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淸野以待 : 들판의 작물과 가옥을 철거하여 적군을 기다리도록 명하였다. 
遜寧 :  손녕이  
遣耶律好德 : 야율호덕(耶律好德)을 보내어 
賫書 : 서신을 가지고 
至通德門 : 통덕문(通德門)에 이르러 
告以回軍 : 군사를 돌이킨다고 알리고는, 
潛遣候騎三百餘 : 몰래 척후 기병 3백여 명을 보내어 
至金郊驛 : 금교역(황해도 金川)에 이르니 
我遣兵一百 : 우리 편에서 군사 1백 명을 보내어 
乘夜掩殺之 : 밤을 타서 습격하여 죽였다. 
○ 
辛巳 : 신사일에 
契丹回兵 : 거란이 군사를 돌려 
至漣渭州(至漣渭州) : 연위주에 이르니 
邯贊等 : 감찬 등이 
掩擊 : 습격하여 
斬五百餘級 : 머리 5백여 급을 베었다. 
○ 
二月己丑朔 : 2월 초하루 기축일에 
丹兵過龜州 : 거란 군사가 귀주를 지나니 
邯贊等) : 감찬 등이 
邀戰於東郊 : 동쪽들에서 맞아 크게 싸웠는데 
兩軍相持 : 양편의 군사가 서로 버티어 

勝敗未決 : 승패가 결정되지 않았다. 
金宗鉉引兵赴之 : 김종현이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왔는데 
忽風雨南來 :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고 
旌旗北指 : 깃발이 북쪽을 가리키자 
我軍乘勢奮擊 : 우리 군사가 형세를 타서 분발하여 치니 
勇氣自倍 : 저절로 배로 용기가 났다. 
丹兵奔北 : 거란 군사가 패하여 북쪽으로 도망하니 
我軍追擊之 : 우리 군사가 뒤쫓아 쳐서
涉石川至于盤嶺 :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렀다. 
僵尸蔽野 : 죽어 넘어진 시체가 들판을 덮고, 
俘獲人口 : 사로잡은 군사와 
馬駞甲冑兵仗 : 말ㆍ낙타ㆍ갑옷ㆍ투구ㆍ병기는 
不可勝數 :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었으며, 
生還者 : 살아 돌아간 자가 
僅數千人 : 겨우 수천 명뿐이었으니, 
丹兵之敗 : 거란 군사의 패전함이 
未有如此時之甚 : 이때와 같이 심한 적은 없었다. 
丹主聞之大怒 : 거란주가 소식을 듣고는 크게 노하여 
遣使責遜寧曰 : 사자를 보내어 손녕에게 꾸짖기를, 
汝輕敵深入 : “네가 적을 깔보고 깊이 들어가서 
以至於此 :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何面目見我乎 :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볼 것이냐. 
朕當皮面 : 짐이 마땅히 네 낯가죽을 벗긴 
然後戮之 : 후에 죽일 것이다." 하였다.
○ 
甲午 : 갑오일에 
三軍凱還 : 삼군(三軍)이 개선하여 돌아와 
獻俘獲 : 포로와 전리품을 바쳤다. 
王親迎于迎波驛 : 왕이 영파역(迎波驛)에서 친히 맞이하여 
結綵棚 :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備音樂 : 음악을 갖추어 
宴賜將士 : 잔치를 베풀고 장사들에게 물품을 내려주었다. 
以金花八枝 : 왕이 금화(金花) 여덟 가지[枝]를 
親揷邯贊頭 : 친히 감찬의 머리에 꽂아 주고, 
右執金觴 : 오른손으로 금 술잔을 들고 
左執邯贊手(左執邯贊手) : 왼손으로 감찬의 손을 잡고는 
慰嘆不已 : 위로하고 감탄하기를 마지않으니 
邯贊拜謝不敢當 : 감찬이 배사(拜謝)하면서 감히 받지 못하였다. 
遂改迎波爲興義 : 마침내 영파역(迎波驛)을 흥의역(興義驛)이라 고치고, 
賜驛吏冠帶 : 역리(驛吏)에게 관대(冠帶)를 내려주어 
與州縣吏同 : 주ㆍ현의 이(吏)와 같게 하였다. 
○ 
姜邯贊上表請老 : 강감찬이 표문을 올려 퇴직하기를 청하니
不允 : 윤허하지 않고 
賜几杖 : 안석과 지팡이[几杖]를 내려주었다. 
○ 
冬十一月 : 겨울 11월에 
以姜邯贊 : 강감찬(姜邯贊)을 
檢校太尉 : 검교태위 
門下侍郞 : 문하시랑 
同內史 : 동내사 
門下平章事 : 문하평장사 
天水縣開國男 : 천수현 개국남 
食邑三百戶 : 식읍삼백호로 봉하였다. 
○ 
以崔士威 :  최사위(崔士威)를 
爲推忠佐理 : 추충 좌리 
同德功臣淸河縣開國男 : 동덕공신 청하현개국남 
食邑三百戶 : 식읍삼백호로, 
姜邯贊 : 강감찬을 
爲推忠協謀安國功臣 : 추충협모 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으로,
庾方爲推誠 : 유방(庾方)을 추성 
佐理輔國功臣千乘縣開國男 : 좌리 보국공신 천승현 개국남
食邑三百戶 : 식읍삼백호을 
推忠順 : 추충순 진절 
爲推忠盡節 : 
衛社功臣濟陽縣開國男 : 위사공신 제양현개국남 
食邑三百戶 : 식읍삼백호로, 
姜民瞻 : 강민첨(姜民瞻)을 
爲推誠致理翊戴功臣 : 추성치리 익대공신으로 삼았다.
○ 
門下侍郞姜邯贊 : 문하시랑 강감찬이 . 
表請致仕 : 표문을 올려 치사하기를 청하니 
從之 : 그 말을 들어주고, 
仍加特進 : 이어 특진 
檢校太傅 : 검교태부 
天水縣開國子食邑五百戶 :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로 올렸다 


117 신유 12년(1021)
고려사절요/제3권/현종원문대왕/신유십이년 
○ 
十一月(十一月) ; 11월에 
知中樞事姜民瞻卒 ; 지중추사 강민첨(姜民瞻)이 졸하였다. 
民瞻晉州晉康縣人 ; 민첨은 진주(晉州) 진강현(晉康縣) 사람이다. 
起自書生 ; 서생으로 몸을 일으켜서 
射御非其所長 ; 활쏘기와 말 타기는 그가 잘하는 것이 아니었으나 
然志氣剛果 ; 의지와 기개가 굳세고 과감하여 
屢著戰功 ;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119 계해 14년(1023)
고려사절요/제3권/현종원문대왕/계해십사년(1024) 

春正月 : 봄 정월에 
契丹馬史刀等三人來投 : 거란의 마사도(馬史刀) 등 3명이 와서 의탁하였다.
○ 
西女眞高豆老 : 서여진의 고두로(高豆老)와 
東女眞瑟弗達等九十人來投 : 동여진의 슬불달(瑟弗達) 등 90명이 와서 의탁하였다. 


121 을축 16년(1025)
고려사절요/제3권/현종원문대왕/을축 16년(1025) 
○ 
敎曰 : 교하기를, 
姜民瞻河拱辰功勞俱著 : “강민첨과 하공진의 공로가 모두 현저한데도  
旌賞未優 : 포상이 후하지 못하였으니 
各加官其子 : 각기 그 아들에게 벼슬을 올려주라." 하였다. 


126 경오 21년(1030)
고려사절요/권지삼/현종원문대왕/경오 21년(1030) 
○ 
五月 : 5월에 
加姜邯贊門下侍中 : 강감찬을 문하시중으로 올렸다. 


127 신미 22년(1031)
고려사절요/권지삼/현종원문대왕/신미 22년(1031) 
○ 
六月 : 6월에 
以徐訥檢校太師 : 서눌(徐訥)을 검교태사(檢校太師)로, 
姜邯贊特 : 강감찬(姜邯贊)을 특진 
進檢校太師 : 검교태사 
侍中 : 시중 
天水郡開國侯 : 천수군개국후(特進檢校太師侍中天水郡開國侯)로 삼았다.
○ 
侍中致仕姜邯贊卒 : 시중(侍中)으로 치사(致仕)한 강감찬(姜邯贊)이 졸하였다. 
邯贊衿州人 : 감찬은 금주(衿州) 사람이다. 
性淸儉不營産業 : 성품이 청렴하고 검소하여 산업을 경영하지 않았으며,
少好學多奇略 :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이한 계략이 많았다. 
體貌矮陋衣裳垢弊 : 형체와 외모가 작고 못생겼으며 옷은 때가 묻고 해져서 
不踰中人 : 볼품은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나, 
正色立朝臨大事 : 얼굴빛을 엄정하게 하여 조정에 서서 큰 일을 만나면 
決大策矻然爲邦家柱石 : 큰 계책을 결정하여 우뚝히 국가의 기둥과 주춧돌이 되었다.
年七十 : 나이 70이 되자 
賜几杖 : 왕이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어서 
三日一朝 : 3일마다 한 번씩 조회하게 하였는데, 
遂辭職 : 드디어 관직을 그만두고 
歸城南別墅 : 성 남쪽의 별장으로 돌아갔다. 
卒年八十四 : 84세로 졸하였다. 
弔誅賻贈甚厚 : 뇌(誄)를 내리고 부의를 매우 후히 주었으며, 
諡仁憲 : 인헌(仁憲)이라 시호를 내리고 
命百官會葬 : 백관에게 명하여 회장(會葬)하게 하였다. 
配享顯宗廟廷 :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史臣曰 :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甚矣 : “대단하도다. 
天之仁愛斯民也 : 하늘이 이 백성을 사랑함이여. 
國家 : 국가에 
將有禍敗之來 : 장차 화란이나 패망이 올 때에는 
必生名世之賢 :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현인을 낳아 
爲之備 : 국가의 화란이나 패망을 위하여 대비하는 것이다. 
當己酉庚戌之歲 : 기유(1009)ㆍ경술(1010)의 해에 
逆臣構亂 : 역신(逆臣 강조)이 난을 꾸미고 
强敵來侵 : 강한 적국이 와서 침략하여 
內訌外亂 : 내부의 분쟁과 외적의 화란으로 
國步危急 : 국운이 위급하게 되었으니 
于斯時也 : 이때에 
不有姜公 : 강공(姜公)이 없었더라면 
未知將何以爲國也 :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公入參謀議 : 공이 조정에 들어와서는 국가의 모의에 참여하고 
出掌征伐 : 밖에 나가서는 정벌을 맡아, 
平定禍亂 : 화란을 평정하며 
克復三韓 : 삼한을 회복하여 
以爲宗社生民之永賴 : 종사와 생민이 길이 힘입게 되었으니, 
非天之所生 : 하늘이 낳아서 
以備斯人之禍者 : 이 백성의 화란과 패망을 대비한 이가 아니라면 
其孰能與於斯乎(기숙능여어사호) : 그 누가 능히 이에 참여 하리오. 
嗚呼 : 아아, 
威哉 : 성대하도다. 
世傳有一使臣 : 세상에서 전하기를, 한 사신이 
夜入始興郡 : 밤에 시흥군(始興郡)에 들어갔는데 
見大星隕于人家 : 큰 별이 인가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遣吏往視之 : 아전[吏]을 보내어 가보도록 하였다. 
適其家婦生男 : 그런데 마침 그 집 부녀가 사내아이를 낳았기에 
使臣心異之 : 사신이 마음속으로 이상히 여겨 
取歸以養 : 아이를 데리고 돌아와서 길렀는데 
是爲邯贊 : 이가 강감찬이었다. 
後宋使見之 : 후에 송의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 
不覺下拜曰 :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뜰아래 내려가 절하면서 말하기를 
文曲星 : '문곡성(文曲星)을 
不見久矣 : 보지 못한 지가 오래였는데 
今在此 : 지금 이곳에 있구나.' 하였다 한다. 
是說似涉荒唐 : 이 말이 황당한 것 같으나, 
然傅說 : 부열(傅說)은 
爲箕尾之精 : 기성(箕星)ㆍ미성(尾星)의 정기(精氣)였고 
申甫 : 신백(申伯)과 
維崧岳之降 : 중산보(仲山甫)는 숭악(崧岳)의 정기를 타고 태어났으니, 
獨於邯贊 : 유독 감찬에게만 
何疑乎 : 어찌 의심하랴."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