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천강씨 소개

금천강씨 소개

금천강문

금천강문(衿川姜門)은 휘(諱) 여청(餘淸)께서 신라말엽에 금주[(衿州)시흥(始興)]에 와서 거주하시어 관향[(貫鄕) - 시조가 태어난 땅을 本鄕(본향) 또는 貫鄕(관향)이라 함]을 금천(衿川)으로 삼았는데 이분이 곧 시조(始祖)이시다. 그 후 수대(數代)가 실전(失傳)되었는데 원류보(源流譜) 및 성원총록(姓苑叢錄)에 의하면 “세대(世代)가 먼 까닭에 자세히 상고(相考)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고려 초기 태조(太祖)왕건(王建)을 도운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 휘(諱) 궁진(弓珍)이 계셨는데 시조(始祖)로부터 수대를 상고(相考)할 수 없어 우리 문중은 개국벽상공신 휘 궁진을 일세(一世)로 삼고 있다.
공(公)께서는 문곡성(文曲星)의 정기(精氣)를 받은 휘(諱) 감찬(邯贊)을 낳으셨다. 감찬 공은 그 유명한 귀주대첩(龜州大捷)의 영웅, 인헌공(仁憲公) 강감찬(姜邯贊)장군(將軍)이시다. 인헌공 이하로 십세(十世)를 내려오면서 계속 관직을 이어 문벌(門閥)은 번창(繁昌)하였으나 손(孫)이 귀해 독자(獨子)로 이어왔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휘(諱) 양(揚)께서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역임(歷任)하셨는데 이분이 사남(四男)을 두시어 비로소 甲派(갑파) 乙派(을파) 丙派(병파) 丁派(정파)로 파(派)가 나뉘게 되었다. 갑파는 주로 이북(以北)에 거주한 관계로 후손(後孫) 록(錄)을 상고(相考)할 수가 없고 병파는 절손(絶孫)하였다.
조선조(朝鮮朝16대) 인조(仁祖)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삼전도(三田渡) 수모(受侮)후 청(淸)의 볼모(人質)로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소현 세자빈(世子嬪)의 심양(瀋陽)생활(生活)때 소현 세자빈 강씨(姜氏)는 여성 CEO로 두각(頭角)을 나타냈는데, 세자빈 강씨가 금천강문(衿川姜門) 十九世 손(孫) 우의정 문정공(文貞公) 휘(諱) 석기(碩期)의 따님이시다.
九年의 볼모생활을 마치고 환국(還國)한 소현세자가 三개월 만에 사망하게 되는데 이는 감기 치료를 위해 李馨益(이형익)에게 침을 맞고 의문사(疑問死)한 것이다. 그 후 역적 김자점(金自點)과 조소용(趙昭容)이 인조와 소현세자빈 사이를 온갖 음해로  이간(離間)시켜 강빈옥사(姜嬪獄事)로 비화(飛禍)돼 강빈은 사약(賜藥)을 친가(親家)는 국문(鞫問)으로 금천가문(衿川家門)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해 많은 문중 원들이 본관(本貫)을 바꾸거나 은둔생활(隱遁生活)로 후손(後孫)이 번창하지 못해 희성(稀姓)으로 몰락(沒落)해 현재 전국의 인구가 약 二千여명에 불과한 소문중(少門中)이며 京畿道(경기도) 光明市(광명시) 老溫寺洞(노온사동)에 소현세자빈의 능(陵)인 영회원(永懷園)과 금천강씨 묘역(墓域)이 있으며 금천강씨의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있는 곳이 기도하다.

참고자료(조선왕조실록)

인조 46권, 23년(1645 을유 / 청 순치(順治) 2년) 6월 27일(무인) 1번째기사
소현 세자의 졸곡제를 행하다     
소현 세자의 졸곡제(卒哭祭)를 행하였다. 전일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집을 지어 단확(丹艧)2020) 을 발라서 단장하고, 또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으므로, 상이 그 사실을 듣고 불평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상의 행희(幸姬) 조 소용(趙昭容)은 전일부터 세자 및 세자빈과 본디 서로 좋지 않았던 터라, 밤낮으로 상의 앞에서 참소하여 세자 내외에게 죄악을 얽어 만들어서, 저주를 했다느니 대역부도의 행위를 했다느니 하는 말로 빈궁을 무함하였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外人)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하였다.
당시 종실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의 아내는 곧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서제(庶弟)였기 때문에, 세완이 내척(內戚)으로서 세자의 염습(斂襲)에 참여했다가 그 이상한 것을 보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48장 B면
【영인본】 35책 229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금천강문과 진주강문은
궤를 달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족보(族譜)는 고려시대(高麗時代)부터 왕실(王室)의 계통(繼統)을 기록(記錄)한 왕대종록(王代宗錄)이 처음이며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양반(兩班) 귀족(貴族)은 그 씨족(氏族)계보(系譜)를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하여 귀족 사이에는 계보(系譜)기록(記錄) 보존(保存)했을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와서 사대부(士大夫) 집안에서 사적(史蹟)으로 간행(刊行)되기 시작하였으나 1476년(조선(朝鮮) 성종(成宗) 7년)의 안동권씨(安東權氏) 성화보(成化譜)가 족보(族譜)의 형태(形態)를 갖춘 최초(最初)의 족보라고 한다.
이후 1565년(조선(朝鮮) 명종(明宗) 20년)에 문화유씨(文化柳氏) 가정보(嘉靖譜)가 혈족(血族) 전부(全部)를 망라(網羅)하여 간행되면서 명문세족(名門世族)들이 앞 다투어 족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뿌리를 찾아서의 족보이야기에서 인용)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의하면 은열공(殷列公) 강민첨(姜民瞻)장군(將軍)은 진주(晉州) 진강현(晉康縣)사람(고려사절요/제3권/현종원문대왕/신유십이년<서기1021년>)이라고 기록했고 인헌공(仁憲公) 강감찬(姜邯贊)은 금주(衿州)사람(고려사절요/권지삼/현종원문대왕/신미 22년<서기1031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역사(歷史)기록(記錄)을 볼 때 우리나라의 족보(族譜)형태(形態)를 갖추기 이전에 이미 금천강문(衿川姜門)과 진주강문(晉州姜門)은 관향(貫鄕)을 달리 쓰고 있었음을 확인(確認)할 수 있다.
금천강문은 계해보(癸亥譜 서기1803년)를 시작으로 신해보(辛亥譜 서기1911년) 기해보(己亥譜 서기1959년) 무진보(戊辰譜 서기1988년)(衿川姜氏族譜)를 발간(發刊)했다.

참고자료(고려사절요)

인헌공 강감찬장군 돌아가신 기록

127 신미 22년(1031)
고려사절요/권지삼/현종원문대왕/신미 22년(1031) 
○ 
六月 : 6월에 
以徐訥檢校太師 : 서눌(徐訥)을 검교태사(檢校太師)로, 
姜邯贊特 : 강감찬(姜邯贊)을 특진 
進檢校太師 : 검교태사 
侍中 : 시중 
天水郡開國侯 : 천수군개국후(特進檢校太師侍中天水郡開國侯)로 삼았다.
○ 
侍中致仕姜邯贊卒 : 시중(侍中)으로 치사(致仕)한 강감찬(姜邯贊)이 졸하였다. 
邯贊衿州人 : 감찬은 금주(衿州) 사람이다. 
性淸儉不營産業 : 성품이 청렴하고 검소하여 산업을 경영하지 않았으며,
少好學多奇略 :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이한 계략이 많았다. 
體貌矮陋衣裳垢弊 : 형체와 외모가 작고 못생겼으며 옷은 때가 묻고 해져서 
不踰中人 : 볼품은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나, 
正色立朝臨大事 : 얼굴빛을 엄정하게 하여 조정에 서서 큰 일을 만나면 
決大策矻然爲邦家柱石 : 큰 계책을 결정하여 우뚝히 국가의 기둥과 주춧돌이 되었다.
年七十 : 나이 70이 되자 
賜几杖 : 왕이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어서 
三日一朝 : 3일마다 한 번씩 조회하게 하였는데, 
遂辭職 : 드디어 관직을 그만두고 
歸城南別墅 : 성 남쪽의 별장으로 돌아갔다. 
卒年八十四 : 84세로 졸하였다. 
弔誅賻贈甚厚 : 뇌(誄)를 내리고 부의를 매우 후히 주었으며, 
諡仁憲 : 인헌(仁憲)이라 시호를 내리고 
命百官會葬 : 백관에게 명하여 회장(會葬)하게 하였다. 
配享顯宗廟廷 :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史臣曰 :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甚矣 : “대단하도다. 
天之仁愛斯民也 : 하늘이 이 백성을 사랑함이여. 
國家 : 국가에 
將有禍敗之來 : 장차 화란이나 패망이 올 때에는 
必生名世之賢 :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현인을 낳아 
爲之備 : 국가의 화란이나 패망을 위하여 대비하는 것이다. 
當己酉庚戌之歲 : 기유(1009)ㆍ경술(1010)의 해에 
逆臣構亂 : 역신(逆臣 강조)이 난을 꾸미고 
强敵來侵 : 강한 적국이 와서 침략하여 
內訌外亂 : 내부의 분쟁과 외적의 화란으로 
國步危急 : 국운이 위급하게 되었으니 
于斯時也 : 이때에 
不有姜公 : 강공(姜公)이 없었더라면 
未知將何以爲國也 :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公入參謀議 : 공이 조정에 들어와서는 국가의 모의에 참여하고 
出掌征伐 : 밖에 나가서는 정벌을 맡아, 
平定禍亂 : 화란을 평정하며 
克復三韓 : 삼한을 회복하여 
以爲宗社生民之永賴 : 종사와 생민이 길이 힘입게 되었으니, 
非天之所生 : 하늘이 낳아서 
以備斯人之禍者 : 이 백성의 화란과 패망을 대비한 이가 아니라면 
其孰能與於斯乎(기숙능여어사호) : 그 누가 능히 이에 참여 하리오. 
嗚呼 : 아아, 
威哉 : 성대하도다. 
世傳有一使臣 : 세상에서 전하기를, 한 사신이 
夜入始興郡 : 밤에 시흥군(始興郡)에 들어갔는데 
見大星隕于人家 : 큰 별이 인가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遣吏往視之 : 아전[吏]을 보내어 가보도록 하였다. 
適其家婦生男 : 그런데 마침 그 집 부녀가 사내아이를 낳았기에 
使臣心異之 : 사신이 마음속으로 이상히 여겨 
取歸以養 : 아이를 데리고 돌아와서 길렀는데 
是爲邯贊 : 이가 강감찬이었다. 
後宋使見之 : 후에 송의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 
不覺下拜曰 :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뜰아래 내려가 절하면서 말하기를 
文曲星 : '문곡성(文曲星)을 
不見久矣 : 보지 못한 지가 오래였는데 
今在此 : 지금 이곳에 있구나.' 하였다 한다. 
是說似涉荒唐 : 이 말이 황당한 것 같으나, 
然傅說 : 부열(傅說)은 
爲箕尾之精 : 기성(箕星)ㆍ미성(尾星)의 정기(精氣)였고 
申甫 : 신백(申伯)과 
維崧岳之降 : 중산보(仲山甫)는 숭악(崧岳)의 정기를 타고 태어났으니, 
獨於邯贊 : 유독 감찬에게만 
何疑乎 : 어찌 의심하랴." 하였다. 

참고자료(고려사절요)

은열공 강민첨장군 돌아가신 기록

117 신유 12년(1021)
고려사절요/제3권/현종원문대왕/신유십이년 
○ 
十一月(十一月) ; 11월에 
知中樞事姜民瞻卒 ; 지중추사 강민첨(姜民瞻)이 졸하였다. 
民瞻晉州晉康縣人 ; 민첨은 진주(晉州) 진강현(晉康縣) 사람이다. 
起自書生 ; 서생으로 몸을 일으켜서 
射御非其所長 ; 활쏘기와 말 타기는 그가 잘하는 것이 아니었으나 
然志氣剛果 ; 의지와 기개가 굳세고 과감하여 
屢著戰功 ;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